2016. 9. 6 – 10. 4 윤주동 Yoon Ju Dong / 윤주동의 그릇되지 않은 그릇

달항아리 45×45×45cm 백자 2016

달항아리 45×45×45cm 백자 2016

달항아리의 현대적 변용을 통한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전모

 

 

달항아리는 우리민족의 정신적 특수성이 가장 잘 반영된 조형으로, 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도예가라면 한 번쯤은 빚어 보았을 법하며, 몇몇 화가들은 이를 소재로 여러 조형적 체계를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 이외에도 디자인을 비롯한 다른 시각예술장르의 작가들은 달항아리를 통해 화법(話法)의 다양화를 시도했으며, 문인들도 일찍이 그들만의 소통체계인 언어의 조합을 통해 시의에 부합한 변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머물지 않고 작곡이나 공연을 한사람도 있으니 그 대중적 인기를 가히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대중적인 모티프인 달항아리는 다원적 해석수단 속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온화한 적요(寂寥)로 내비춰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달항아리를 매개로한 재해석과 변용에는 탁월한 능력이 필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안하니 만 못하는 부작용과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다행스럽게도 윤주동의 달항아리는 여기에 결코 해당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소성 후 생각지 못했던 요변(窯變)이 작품의 가치를 더 발현케 하는 것 같은 신선함마저 준다.

윤주동의 달항아리는 풍만하거나 넉넉한 기존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예부터 달항아리의 태토로 널리 쓰인 양구 백토에 비해 차가울 정도로 강질인 설백(雪白)의 백자 흙을 바탕으로 한 흰 백자 큰 접시에 상감(象嵌)으로 틀을 잡은 윤주동의 달항아리는 평면에 얕은 부조 양각으로 은은하게 드러나고 있다. 윤주동은 그래서 이 그릇을 달그릇이라 한다.

양구백토는 달항아리가 주로 만들어졌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걸쳐 애용된 자토(瓷土)다. 소성을 하면 연한 살구 빛으로 변하며 기질(器質)은 청화백자보다 다소 거친 게 특징이다. 이는 장작 가마와 가마내부의 미세한 온도차 등에서 나오는 예측하지 못한 요변과 투박한 발 물레를 통해 그 미학적 특징은 완결된다.

무른 토성으로 인해 소성 후 연질의 기벽은 따뜻한 온기가 쉽게 전달되며 자토 특유의 거친 입자로 인해 기포자국 같은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따라서 장기간 간장과 같은 유색 액체를 담아놓으면 기포의 틈새를 통해 새어나와 부분부분 비정형의 원 문양을 보이기도하고 그것들이 서로 만나기라도 하면 부석사 안양루(安養樓)에서 내려다보는 석양을 등진 소백산맥의 역광 실루엣이 무작위적 자연미를 연출하기도 한다. 무계획의 계획, 비정재성, 무관심성, 구수한 맛, 자연에 순응, 소박성, 자연성 등 고유섭선생이 말한 우리미술의 개념이 이렇게 일치할 수 있을까, 새삼 감탄하게 된다.

윤주동은 그 동안 달항아리 아니 달그릇을 통해 추사(秋史)가 말한 입고출신(入古出新: 옛 것으로 들어가서 새 것으로 나온다.)을 실현해보고자 다양한 실험을 해 왔다. 이번 작품은 ‘지금까지 있어온 아름다움, 그리고 앞으로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는 그의 작업일지의 되 뇌임처럼 보인다.

차갑고 작위적이기까지 한 유백색 백자접시는 소성 후 생겨날 수 있는 자연의 뜻 즉, 우연한 맛을 기대하기 힘든 가스 가마를 통해 더욱 견고하고 냉정하다. 상감이나 요철(凹凸)방식의 정교한 실루엣으로 표현된 달항아리는 기존 백자대호의 공간성을 확보하기 위해, 회화에서 캔버스와 같은 배경을 차가운 백자접시가 대신해 그 존재성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최순우선생이 강조했던 ‘무심스럽고 어리숭한 둥근 맛’과는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요철의 실루엣을 통한 달항아리는 매우 일정한 간격의 두께와 높이를 보이고 있어 누가 달항아리를 어리숭하다고 했나 싶을 정도로 새침하다. 때로는 요철위에 코발트를 채색해 달항아리의 명료성을 지나치게 강조했지만 청색 안료 특유의 재질감에서 비롯된 농담의 차이는 그나마 긴장감을 이완케 한다.

 

“항아리를 만들기로 한다. 무거운 듯하여 종이 위에 그린다.

어차피 형태만을 취하는 것.

허나 아쉽다.

안고 싶을 때 안을 수 없는 애틋함으로 그리움까지······,

접시에라도 그려낸다.

 

창밖으로 몸을 빼서 달을 찾는다.

아쉬운 대로 그릇하나를 벽에 건다. 달그릇 이다.

달은 중력적이지 않다…………………………………….. 뜬다.”(작업일지 중에서)

 

윤주동의 달은 벽에도 걸려있어 밤(夜)을 연출하기도하고 바닥에 놓인 백자 접시 속에 담겨, 달이 사라진 접시 밖의 세상을 낮으로 돌려놓기도 한다. 수평으로 놓인 그릇에 물이라도 담게 되면 하늘에 뜬 보름달이 투영된 호수 같아, 그 주변 공간은 차라리 차가운 한기마저 느껴지게 한다. 달항아리를 실루엣만 살려 성(城)처럼 요철화한 접시에 물을 하나 가득 담기라도 하면 달은 만물소생의 원천인 물(생명)의 안식처가 되어 너른 포용성으로 상징화된다. 따라서 윤주동의 달은 중력을 거슬리며 또는 거슬림 없이 빚어낸 인위적인 것 중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즉, 물레질을 ‘중력의 세상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려 만들어낸다, 뼈 없는 살로······,’라고 의미부여한 그의 개념과 하나를 이루는 지점에 그의 달그릇도 놓여있는 샘이다.

조선의 달항아리가 생활 속에서 민간 신앙적 가치를 부분적으로나마 부여받았다면 윤주동의 달그릇은 달 스스로가 미적 이질화를 통해 다원화한 상징체계로 이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릇됨 없는 그릇.

그릇되지 않은 그릇

그리고 그릇되지 않을 그릇”(작업일지 중에서)

 

그는 한동안 달항아리 보다 200~300년을 소급해 15세기 인화문 분청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 섬세하고 수많은 점들의 이합집산은 종국에는 단일한 상징 언어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몇 점의 작품을 통해 축적된, 그 동안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자꾸 산화되어 가는데 도자기는 환원되어 간다. 바위가 돌멩이가 되고, 돌멩이가 흙이 되고, 다시 그 흙을 뭉쳐 돌을 만들고 그 돌이 보석이 된다.-도자기”(작업일지 중에서)

윤주동의 작업일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화문의 점(點: 부서짐)과 달그릇의 규합(糾合: 뭉쳐짐)은 그가 말한 산화와 환원의 반복 즉, 흙의 윤회와도 같은 개념으로 투영된다. 인화문의 점들이 하늘의 별이었다면 윤주동은 달을 통해 또 다른 실험의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윤주동의 달그릇은 성공적 실험의 결정체로 또 다른 가능성으로 화답하고 있으므로 1차 그의 현대적 변용은 낙관적이다.

윤태석

미술사(문화학 박사), 문화재전문위원

 

전시명 : 윤주동의 그릇되지 않은 그릇

일시 : 2016년 9월 6일(화) – 10월 4일(화)

장소 : 트렁크갤러리 (Tel. 02-3210-1233)

트렁크갤러리 사정으로 화환을 받지 않습니다. 주시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