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exhibit

11월 이민호, Lee, Minho / 내가 싸우듯이 As If I Fight

 

B #1

B #1, 100 x 100cm, Inkjet print, 2016

 

불화하는 몸들의 상황극장

너는 배회한다, 너는 배회한다, 너는 배회한다.

너는 걷는다. 모든 순간들은 우열이 없어지고,

모든 장소들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 있다.

조르주 페렉, 『잠자는 남자』

그 어떤 기이하고 낯선 몸보다도 더 낯설어지는 몸.

장-뤽 낭시, 『코르푸스』

 

 

B #2_1

B #2, 100 x 100cm, Acrylic on canvas, 2002

 

B #2

B #2, 100 x 100cm, Inkjet print, 2016

 

 

 

  1. 위장술 - 불화하는 몸과의 대면

불현 듯 의식을 덮쳐 오는 몸이 있다. 의식이 몸을 소환한 것이 아니라, 몸이 의식을 잡아채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도록 자신에게 붙들어 매는 그런 몸말이다. 가령, 욕실 문을 슬그머니 밀고 들어와 벌거벗은 나의 몸을 미동도 없이 응시하고 있는 고양이 앞에서 순간적으로 느끼게 되는 어떤 곤란한 부적절함, 그리고 이런 심리적 동요의 틈을 비집고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는 몸 자신의 어떤 현존이 있다. 몸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동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동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직 진정으로 몸과 조우해 본 적이 없다. 몸과의 진정한 조우는 의지가 방향을 잃고 의식이 대상을 놓쳐버리면서 출현하는 어떤 절대적인 수동성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는 힘, 즉 이성을 원했던 이브가 선악과를 한 입 베어 문 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그 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함과 충만함의 세계로부터 쫓겨난 인간이 자신의 벌거벗음을 수치심이라는 감정으로 맞이했다는 것, 그 순간부터 인간은 동물들과의 동일성에서 추락해 자신의 벌거벗음을 감추기 위한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이 원초적인 벌거벗음을 부인하고 은폐하기 위한 기술들로써, 문명이란 이 고백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감추기 위한 기나긴 위장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시대는 이 위장술의 역사에서 벌거벗은 몸을 장악하기 위해 사회 시스템 전체가 가동되는 전대미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한병철이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주변을 떠도는 몸들은 성(性)의 기호로 기능하는 몸, 상품화된 몸, 관리 대상으로서의 몸, 사물이 되어버린 매끄러운 몸이다. 보는 것, 만지는 것, 먹는 것, 성교하는 것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몸들의 불만에 찬 야유는 주체로 하여금 보다 더 전문화 된 관리와 경영을 요구하고 나르킷소스의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나 주체를 향한 이런 호소는 몸 자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동력이 되고 있는 기호가 되거나 기호가 입혀진 것으로서의 몸에 대한 것이다. 포르노그래피가 된 오늘날의 몸을 구원하는 것이 예술의 구원이라는 한병철의 주장은 그러나 에로스와 아름다움이라는 관념들을 폐기하지 않음으로써 몸을 다시 한 번 미학적으로 신화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사유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 혹독한 겨울 전쟁터에서도 자신의 몸을 정지시킬 줄 알았던 소크라테스로부터 출발한 철학은 이미 몸이라는 실존을 부정하거나 아름답게 순화시켜 지고한 이념과 통합하려는 전략 속에서 전진해왔기 때문이다. 철학이 대립을 지양하고, 모순을 통일하며, 결핍을 보충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점에서 전적으로 데리다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이 오랜 시간 정신과 육체 사이의 간극과 불화를 봉합해 온 것에 반해, 예술은 몸과의 관계에서 다른 방식을 취해왔다. 테크네(technē)라는 기원을 취하든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기원을 취하든 예술은 작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자신의 몸과 함께, 자신의 몸으로서 드러나야 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들이 이것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신의 죽음과 이념의 종말, 가치에 대한 불신과 자아에 대한 의심들이 터져 나올 시간들이 필요했다. 어찌되었든 오늘날의 현대예술은 이전의 그 어떤 시대보다 불화하는 몸과 가까이 있으며, 위장술의 간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규칙과 질서에서 탈주하고, 조화와 균형을 파괴하며,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폐기처분하고 있다.

 

  1. /몸들 고유성으로부터의 추락

이민호의 작업은 불안한 듯 배회하는 익명의 신체, 불편함이 느껴질 만큼 노골적으로 화폭을 채운 주름진 살들과 절단된 신체 부위들을 통해서 시대와 불화하는 몸을 담아낸다. 그것들은 더 이상 어떤 개별적 정체성이나 사회적 기호도 찾아볼 수 없는 벌거벗은 몸들, 그림자 외에는 어떤 것도 갖지 않는 단절된 몸들이다. 이민호는 이 번 전시에 정지돈의 소설집 제목을 차용한 <내가 싸우듯이>라는 제목을 제시했다. 작가 자신과의 싸움, 작업과의 싸움, 과거와의 싸움, 지금과의 싸움, 세계와의 싸움, 무수한 몸들과의 싸움 등, 무한히 열거 가능한 이 싸움의 한복판에는 저 몸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몸, 예술가의 몸이자 예술가가 말하고자 하는 몸은 무엇인가?

몸과 관련해 현대예술이 취해 온 태도는 한 편으로는 몸의 환상을 증폭시키거나 파괴하는 흐름과 다른 한 편으로는 벌거벗은 몸이라고 할 수 있는 몸의 실재를 탐색하는 흐름으로 나뉠 수 있다. 전자의 몸들이 바바라 크루거의 <당신의 몸은 전쟁터이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라는 유명한 정식을 부여할 수 있는 ‘싸우는 몸들’이라면, 후자의 몸들은 존재의 익명적 상태에서 마주하게 되는 ‘벌거벗은 몸들’이다. 사회적 기호를 입고 있는 신디 셔먼, 에로티시즘의 파국을 노출시키는 낸 골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김수자 등과 같은 전자의 예술가들은 몸이 부여받아 온 모든 제도와 윤리와 관행들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한다. 이들은 젊음, 건강, 섹시, 쾌락, 여성성, 남성성 등 근대적 사유가 정교하게 세공해 놓은 ‘고유한 몸’이라는 관념에 구멍을 내고 뒤흔들려 한다. 반면 신체의 나약한 헐벗음을 표현하는 오노 가즈오, 응축되고 흘러내리는 뼈와 살을 보여주는 프란시스 베이컨, 운동하고 정지하고 소멸하는 몸에 집착한 사무엘 베케트 등과 같은 후자의 예술가들은 세계와의 놀이가 중단되는 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몸, 정신의 연장에서 이탈되고 행위의 목적에서 탈구된 몸에 집착한다. 이들에게 몸은 소유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기호가 될 수 없는 것, 즉 데카르트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했던 것처럼 불확실한 감각적 확실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이민호의 작업이 위치하는 곳은 후자를 향해서 있다. 프랑스 유학 시절 이민호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 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고 주위세계가 단절되었으므로 자신과 대면하는 것 외에는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시간들을 마주해야 했다.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자유의 시련, 관계의 공백 속에서 이민호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déclasser’라는 단어를 붙들었다. 자격을 취소하는 것, 사회적 지위에서 낙오되는 것, 자리를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 완전히 소속될 수 없는 유학생이라는 불안정한 위치를 대변하는 것이었기에, 이민호는 일상과 불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기호를 벗겨내 보고자 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세 겹의 구조로 자신의 자리를 건축한다. 국가와 같은 거시적 시스템이 부여하는 소속의 자리, 집단의 행위에 척도를 부여하는 윤리적 자리, 그리고 자신만의 의미와 목적을 구축해 나가는 개체성의 자리가 그것이다. 이념의 종말 이후 우리 시대는 행복이라는 기표를 최상의 가치로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소유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개체성의 자리가 모든 것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이민호는 ‘déclasser’라는 단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투하던 자들이 어느 순간 문뜩 깨닫게 되는 이탈, 즉 사회적 분류체계에 완전히 통합되지 못하고 세계 바깥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참을 보았다. 조르주 페렉은 소설 『잠자는 남자』에서 이들의 무리를 관찰하며 이렇게 쓴다. “네가 여기서 할 일이라고는, 왔다갔다하거나, 종종걸음치거나, 멈추어서는 이 사람들의 무리를 응시하는 것뿐이다.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누가 이들을 부르는 것인가? 어떤 힘이나 신비가 있어, 이들로 하여금 오른발 다음에 왼발을, 그것도 그 이상의 효과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협조적인 방식으로, 인도 위에 번갈아 내려놓게 만드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바닥까지 소진시키다 결국은 잉여가 되어버리는 인간들, 인생의 행로가 그런 뻔한 결말을 예비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굳이 무엇인가를 열망해야 할 필요는 무엇인가? 오히려 이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그 무엇도 원하지 않기. 기다릴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기, 온갖 계획으로부터, 모든 성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욕망 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 이민호는 ‘déclasser’를 붙듦으로써 몸에 씌워진 개별성의 기호들을 지워낸다. 그리고 에로스나 아름다움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날것으로서의 몸, 그저 현존하는 것 외에는 세계와의 어떤 동거도 거부하는 날것으로서의 몸을 향해서 다가간다.

 

D #5, 116 x 91cm, Inkjet print, 2016

 

D #6, 116 x 91cm, Inkjet print, 2016

 

  1. 상황극장 - 가능성의 증폭 또는 소멸

그런데 이 날것으로서의 몸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가? 보고, 듣고, 만지고, 작동하면서 나와 함께 나의 몸으로 실재하는 그것을 과연 날것으로서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직까지 자기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몸, 무목적적 의지라 할지라도 어찌되었든 아직까지 나라는 존재의 의지가 완벽하게 제어하는 몸이 아닌가? 코나투스 에센디(conatus essendi), 즉 자아는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모든 단절을 이어붙이고 불연속을 연속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무한의 카오스 속에서 상상의 별자리를 그려 넣고, 그것들을 이어놓음으로써 의미의 질서를 구축한다. 그러므로 날것으로서의 몸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자기성과 몸의 연결을 끊어내는 것, 의미의 순환 고리를 벗겨내는 것, 이탈이든 분리든 행위의 가능성을 소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민호는 다시 한 번 조르주 바타이유로 돌아가 ‘déclasser’가 가리키는 비정형(informe)에 주목한다. 바타이유는 비정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정형이란 특정한 의미를 제공하는 하나의 형용사가 아니라 각각의 사물이 각자의 형태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세계로부터 이탈하도록(déclasser) 해주는 하나의 용어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의미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지 않는 것, 거미나 지렁이처럼 도처에서 짓눌려 으깨지는 것이다.” 비정형에 대한 바타이유의 이런 정의는 사물의 고유한 형식 혹은 형태에 대한 의심과 함께 그러한 관계를 낱낱이 해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날것으로서의 몸에 대한 해체 풍경은 이렇게 펼쳐지게 된다.

이민호의 작업들은 여기서 파괴적인 방식의 해체를 선택하지 않는다. 파괴적인 해체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특징이다. 그는 해부학자의 손에 들린 매스처럼 감춰진 몸의 히스테리를 적나라하게 적출하려고 하며, 몸이라는 질료에 부과된 형태를 고문하고 뒤틀고 벌려내려고 한다. 그리하여 구타나 살해, 기아, 폭력에 노출된 몸처럼 그의 작품에는 비명과 절규를 내지르는 낯설고 괴물스러운 몸들이 쌓이게 된다. 반면 이민호는 몸의 형태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는 몸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끈기 있게 고유성들을 벗겨내고, 살갗과 근육들, 움직임과 동작이 스스로 풀려나도록 조건과 상황을 반복적으로 변화시킨다. 아주 미세하게 조건들이 변화되고 그 조건들에 맞추어 몸들이 반응하도록 놓아둔다는 점에서 매번의 작업은 하나의 상황극장이 된다. “계속해야 한다, 계속할 수 없다,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계속할 것이다. 말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말들이 있는 한, 그것을 말해야 한다, 말들이 나를 찾을 때가지, 말들이 나를 말할 때가지, 기이한 고통, 기이한 잘못, 계속해야 한다, 어쩌면 이미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민호의 작업은 최종적인 소멸을 향해서 다가가는 베케트의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사막 같은 공간에 나무 한 그루만 남겨놓는 것으로 시작한 베케트의 연극은 창문 하나만을 허용하는 공간으로, 그것조차도 사라지고 말하는 입만 조명으로 비춰지는 암흑의 공간으로 변화되어 가다가, 결국에는 말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닫힌 장소. 말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알려졌다. 말해진 것만 있을 뿐이다. 말해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말해지지 않았다. 알아야 하는 것이라면 알려졌을 것이다. 관심 없다.” 베케트의 연극이 말하기 자체를 소멸시키는 말하기의 무대였다면, 이민호의 상황극장은 몸이 스스로를 말하도록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시켜야 하는 무대이다. 이민호는 이 상황극장의 조건을 세 가지로 구성한다. 첫 번째는 몸의 두께와 경쟁하고 살갗의 음영 속으로 침투해오는 배경의 압박, 도피를 차단하듯 한 발자국도 더는 허용하지 않는 각진 모서리의 차단, 앉기와 서기만을 허용하는 자세의 한정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관찰자의 시선을 중단시키기 위한 시선의 분할이다. 시선을 고립시키는 이러한 분할은 신체의 각각의 부분들이 불안정하게 연결되는 효과를 만들어냄으로써 접점들, 교차들, 단절들의 궤적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세 번째는 회화 이미지와 사진 이미지를 겹침으로써 발생하는 중첩의 효과이다. 이민호는 잡지들과 화보집들에서 임의로 발췌한 인물들의 신체 일부분을 화폭으로 옮겨놓은 예전의 회화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한 다음, 모델에게 유사한 자세를 취하도록 하고서 찍은 사진들과 겹쳐놓는다. 이러한 겹침은 지금 이곳(ici)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ceci)이라고도 지칭할 수 없는 독특한 ‘여기’(voici)를 열어내는데, 그것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저곳과 이곳이 공존하며, 하나이자 다수인 몸의 어떤 현존이 열리게 되는 ‘여기’이다.

D #2,162x97cmm,Inkjet print,2016

D #2, 162 x 97cm, Inkjet print, 2016

D #1,162x97cm,Inkjet print,2016

D #1, 162 x 97cm, Inkjet print, 2016

 

  1. 불화 그가 싸우는 방식

글을 쓰는 자에게 언어는 자신의 작업을 이행하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작업을 배신하는 최악의 적이기도 하다. 작가는 오직 언어로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 최악의 적을 장악하기 위한 끈질긴 분투가 매번의 작업마다 실행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것을 다루는 작가에게 최악의 적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가시적인 것 것이다. 회화나 사진에 있어 이러한 가시성은 2차원의 표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한계조건이 이 시각예술 장르들의 가장 큰 매혹이자 동시에 고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가시성과 관련한 시각예술의 가장 직접적인 고뇌는 살갗에 색을 입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살색(carnation)은 회화 속의 무수히 많은 몸들이 던지는 대대적인 도전장”이 되어왔다고 장-뤽 낭시는 말하는데 이는 각 시대의 미적 이념이 바로 살색을 통해서 회화의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민호 역시 가장 많은 고민거리가 살갗의 표현이었다고 말한다. 회화의 이미지는 부드러움과 따듯함이라는 붓질의 속성을 담고 있지만 사진은 날카롭고 차가운 이미지를 만든다. 회화는 몸의 리듬을 따라서 움직이기에 대상보다는 작가 자신에게 충실한 반면, 사진은 정교하게 계산된 설정 값에 따라 피사체를 담아내기에 대상 자체만을 기계적으로 지시한다. 두 가지 이미지를 중첩시키기 위해서는 그래서 피부의 톤과 질감, 강도를 어느 정도까지 만나게 해야 하는지, 그 균형점의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장르들의 대립은 당연히 불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민호는 이 불화를 봉합하기보다는 싸움을 계속하도록 형상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날것으로서의 몸이 지니는 어떤 파열을 담아냄으로써 그것과 접촉하는 모든 것들을 불안정하게 만들게 된다. 자기 동일성으로 회귀하지 않는 분열된 형상들은 그래서 사회적 가치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리를 박탈당한 어떤 몸들이 존재한다는 것, 아무런 본질도 기입되지 않은 채 다만 바깥을 향해서 열려있는 몸이라는 순전한 현존이 우리 자신으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고지하게 된다. 한쪽은 작가의 몸과 접촉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피사체의 실재성을 붙들고 있는 익명적인 몸의 육화(incarnation)를 통해서 말이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를 주조한다는 것은 현실을 포착하거나 어떤 관념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 행위하는 것이고 하나의 관념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민호의 이번 작업은 전시 제목이 알려주는 것처럼 오랜 시간 싸워 온 작업행위들의 궤적들이자 흔적들이다. <Portable Landscape> 시리즈로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 이민호는 사진작업을 통해 익숙한 장소와 일상적인 사물들을 재구성하고 재배치함으로써 ‘낯설면서도 친숙한’(Unheimlichkeit) 공간을 새롭게 열어내는 것들에 오랜 시간을 바쳤다. 한 번의 행위가 그 다음 행위의 원인으로 이어져 하나의 길을 만들 듯이, 사진매체는 그의 주된 장르가 되었으며 낯선 사물들의 공간은 그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들이 되었다. 그러나 공개된 이민호라는 작가의 이면에는 손의 감각으로 이루어지는 회화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자리를 가지지 못한 소외된 인간에 대한 깊은 동질감이 무거운 음영으로 존재해왔다. 이번 전시는 이민호가 이민호라는 기표에 맞서는 싸움, 그림자를 낮의 세계로 진입시키려는 싸움, 그리고 더 이상 그림자이기를 멈추려는 싸움이다. 또한 그것이 그가 자신과, 작품과,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다.

 

이은정(문예미학자)

T #3,30x30cm,Inkjet print,2016

T #3, 60 x 60cm, Inkjet print, 2016

T #2,30x30cm,Inkjet print,2016

T #2, 60 x 60cm, Inkjet print, 2016

T #1,30x30cm,Inkjet print,2016

T #1, 60 x 60cm, Inkjet print, 2016

 

 

 

 

 

 

 

 

 

 

전시명 : 이민호, Lee, Minho / 내가 싸우듯이 As If I Fight

일시 : 2016년 11월 4일(금) – 2016년 11월 30일(수)

장소 : 트렁크갤러리 (Tel. 02-3210-1233)

트렁크갤러리 사정으로 화환을 받지 않습니다. 주시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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