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exhibit

17.11.23~11.29 조부경 Recent 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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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 조부경 Recent Paintings

전시 기간: 2017. 11. 23~11. 29

사물들의 표면을 읽는 ‘말없는 삶’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조부경의 작업태도와 특징을 어떤 말로 서술할 수 있을까. 이미 시대적 흐름을 거슬러 단색조의 추상 형상을 붙들고 있는 그에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아마 이 물음은 보는 이의 질문이자 작가 자신의 질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형상 없는 그리기의 이해야 추상화의 전형적인 특질이자 가치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 없는 혹은 말없음을 기저로 삼고 있는 말하기의 근저, 그리고 우리의 이해의 저변을 환기시키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언어 외적 사유를 되묻는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일은 이른바 ‘말없는’ 삶이다. 규정된 의미의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을 하는 삶이다. “ ‘말없는’ 삶은 자신에게만 속하는 말로써 재능을 지녀야 한다. 이 말은 분절된 담론과 수사학의 수단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물들의 신체들 표면에 새겨져 있는 말이다. 이것이 말없는 사물들의 언어원칙이다.” 조부경의 작업 앞에서는 익히 알고 있는 어휘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색상,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저 색상의 면들, 색의 뭉치들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색면추상이라는 알만한 말로 서술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으로는 어딘가 모자라는 듯하다. 그런 말, 그런 설명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게 되는 바탕으로서 미학적 경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그에 다가가는 일이다. 그의 말은 그에 속하고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그의 도취이며 몰입이고 그 도취가 만든 사물의 변화이며 우리는 그 도취의 추체험자로서 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감성적 공감 외 어떤 개입도 불가하다.

3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30.3x97cm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30.3×97cm

7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30.3°ø130.3cm Untitled, 2016, Acrylic on Canvas, 130.3×130.3cm

크든 작든 한 화면에 두 개의 층위를 가진 색상과 형상이 자리를 한다. 주조 색과 배경색으로 나눠지고 사각의 정형과 비정형의 구조가 그것이다. 색과 면이 화면을 이분한다. 이 이분적 성격은 조부경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형식적 특징이자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개념적 태도이기도 하다. 그의 화면은 묘사 대상이랄 수 없는 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가 주를 이룬다. 닮은꼴의 대조와 반복으로 이루어진 형태들이다. 형태라고 하는 것은 중성적인 성격으로 그곳에 배려된 것이 아니라 요인들 간의 배치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다르게 구성될 때 의미가 달라 질 수 있다는 가변성 속에서 그곳에 ‘그렇게 있다’는 필연과 의미를 보여준다.
그런데 좀 더 섬세하게 보면 두 개의 면은 다시 셋이나 넷으로 나눠진다. 자기 분화에 가까운 형태와 색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캔버스의 사각형의 공간 안에서 색 면으로 처리된 사각 면들이 대응하면서 혹은 호응하면서 공간을 구성한다. 면의 분할이 생겨난다. 색상의 변화가 만드는 면의 차이다. 동일면으로 일견되다가 곧 아주 적은 색상의 차이로 처리된 분리와 중첩 면이다. 사각의 기하학적 형태라고 하지만 사선을 이용해서 사각의 정형성에서 벗어난 부정형도 분리의 중요한 요소다. 화면의 구조는 이런 변조에 의해 동일한 인상 위에 이질성이 복합적으로 구축된다. 미묘한 차이지만 차이로서 분명하고 동일성의 특성을 버리지도 않는다. 차이라는 외연과 내포를 분리하기 쉽지 않다.
직선으로 구성된 정형의 면에 사선이 부정형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색상과 연계되면서 단순한 사각형에서 중복된 면들이 생겨난다. 이질성과 동질성의 상호 영향아래 동질성 안의 이질성 혹은 이질성에서의 동질성이라는 차이와 생성, 차이가 만드는 유사와 상사가 구조적 으로 구축되어 있다.
사각형의 형태도 사선으로 생겨나는 부정형에 의해 입방체를 연상케 한다. 이는 화면의 구조가 입체를 평면화한 것이거나 입체 자체의 근원적인 차원이동의 문제로 읽게 한다. 입체이면서 평면인, 평면이면서 입체인 양의적 성격이다. 입체의 거부이면서 평면의 거부이고,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차이라는 생성이 화면전체의 맥락으로 개입된다. 그리고 사선이 만드는 깊이감은 곧 공간 깊이로, 시간의 연차성으로 생기는 운동을 보여준다. 기하학적 형태의 견고한 평면성과 무시간성이 사선에 의해 화면 전체가 입체적 변주 가능성으로 읽히게 되면서 공간과 시간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한 화면 안에서 시간성은 차이가 생성되는 가변적 성격에 다르지 않다
이런 특징은 주변과 중심이라는 일반적인 화면 구성의 분리를 불가능하게 한다. 중앙과 주변이 한 화면의 구조적 배치라는 점에서는 분명하지만 위계적 구조가 아니다. 올오브 페인팅이나 단색조의 친숙한 색면 회화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5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30.3°ø97cm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30.3×97cm

게다가 한 작품, 한 작품 완결성을 가지는 개별 화면을 서로 인접해 놓음으로 연작이거나 한 작품을 두 개의 공간에 놓은 듯한 효과도 노린다.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전시 연출을 통해 작품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한 개의 작품이 하나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연출에 의해 두 개의 작품이 하나의 공간으로 재구성된다. 이는 자신의 작품이 완결이 아니라 언제나 가변적 잠재태를 가지며, 재구성이 개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다른 작품과의 연계가 하나의 구조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가 건축적인 구축성과 연계에 의해 보다 큰 구조적 개념 아래 구성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이미 완결된 개별 작품이 유사에 의해 확장된다는 것인데, 이는 유사를 상사의 차원으로 옮기는 것에 다르지 않으며 유사가 하나의 대상을 전제하는 데 비해 상사가 대상 없이 자신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면에서 전시장에서의 재구성은 유사니 상사니 하는 고정된 이해를 빗겨가는 셈이다. 차이를 통해 변화를, 다른 사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재구성은 작업 구조가 기하학적 구조에 결정적으로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관념적 허구라는 태도다. 그 허구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산물로서 차이를 생성하려는 것이다. 분열증이 아니라 고정된 규범과 법칙에 종속된 구조가 아니라 유동과 생성을 형상화하려 한다. 그림보기의 역동적인 흐름을 체험하는 것이다. 기하학적 개념의 인식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 생성되는 정신의 유연성을 만나려 한다. 말하자면 그의 형태적 특징이 기하학적 형태적 인식의 분할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식이 아닌 ‘느낌’이(규범, 법칙, 목적 없는 표현의 유희가) 우리 영혼의 근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8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30.3°ø162.1cm Untitled, 2016, Acrylic on Canvas, 130.3×162cm

칠 하고 또 칠 하고, 보고보고, 그리고 칠하고, 어떤 형상도 없는 형상 앞에서 보기를 반복하고 그 위에 다시 칠하기를 반복하면서 그 곳에 집중하는 것이 조부경의 제작과정이다. 자신을 몰입하는 수행이다. 그 작업은 일종의 도취이자 몰입이며 자기 탐닉이다. 그 탐닉의 결과물에 우리가 붙일 수 있는 말은 그저 도취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보는 일 역시 이런 과정을 반복할 뿐이고 그런 반복을 통해 도취를 추체험하는 몰입 외 다른 일이 아니다. “도취란 주체의 힘들이 그 의식적 통제에서 벗어날 정도로 고양된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 도취란 다름 아니라 자기방식이자 자신만의 언어다. 앞에 잠시 언급했듯이 그의 말은 그에 속하고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고유한 방식의 능력자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할 수 없음을 할 수 있다. 만일 예술가의 할 수 있음이 할 수 없음의 할 수 있음이라면, 예술가들로부터의 배움의 내용이란 (배운 것을) 잊는 것이다. 곧 ‘잘 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도취 속에서 사물들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도취 속에서 사물들의 변화를 경험하는 일이다. “도취 속에서 사물들은 변한다. ‘이 상태의 인간은 사물을 변용시킨다.’ 도취는 사물들을 ‘완전하게’ 변용시키는 활동방식 가운데 하나다. ‘이런 변용은 완성 속에서 존재해야만 한다.” 조부경의 작업은 자기완성 속에서의 변용이다.

1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62.1°ø130.3cm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62×130.3cm

6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16.7°ø91cm Untitled, 2017, Acrylic on Canvas, 116.7×91cm

그것은 정과 동, 면과 선, 정형과 비정형,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 속에서 생성된다.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의미화되기 전의 문제, 형상화되기 전의 문제, 단일성의 변화 가능성, 그것을 내재적 특징으로 하는 ‘그것(이미지)’을 제기하는 것이다. 도취이자 몰입이며 변용이다.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미학화는 비규정적으로 만듦을” 뜻한다는 그것일 것이다.

강 선 학(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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